Home > 오피니언 > 시사칼럼 > 낭트칙령의 선포와 폐지
시사칼럼오피니언

낭트칙령의 선포와 폐지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프랑스 침례교 목사/ 29회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과 공존할 수 있는가?

프랑스 중세 종교 역사는 한 마디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왔다. 정교 일치의 천주교 국가에서 소수 프로테스탄트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 때 공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수 차례에 걸친 극단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프로테스탄트가 걸어온 과정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 볼 때, 특히 낭트칙령( Edit de Nantes)의 선포와 폐지를 통해서, 한 국가나 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보편적 교훈을 찾아볼 수 있다.

낭트칙령 선포가 지닌 의미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낭트(Nantes)는 카톨릭 세력의 완강한 보루로서, 개혁교 사상을 지닌 부르봉 왕족 앙리 4세 등극에 대해 거칠게 저항했던 지역이다. 바로 이 지역에서 지난 36년간 프랑스 신구교 간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칙령이 1598년 4월에 선포된 것이다. 이는 매우 상징적 의미가 있다. 프랑스 왕족 중 유일하게 개신교 신앙을 가졌던 앙리 4세는 국회, 천주교, 프로테스탄트 간에 힘들게 도달한 타협안을 법으로 인준시킴으로써, 프랑스 역사에서 길이 남을 정치적 치적을 남기었다. 왕의 권위로 보장되며 항구적이고 폐지될 수 없는 이 칙령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평화를 되찾았다. 위그노들은 3 세대 동안 시민으로서, 프로테스탄트로서, 삶과 활동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칙령은 카톨릭이 국교임을 여전히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i) . 양심의 자유를 통해 종교의 선택을 보장하지만, 예배의 자유가 전 영토에서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 목사 생활과 개신교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이 지원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여전히 십일조를 카톨릭 사제에게 내었다. 지역적으로 제한된 조건에서 일부 도시에만 교회당을 세울 수 있었다. 사실 그 당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는 서부 도시 라로셀(La Rochelle)에서 동부 도시 그레노블르(Grenoble)에 이르기까지 반월형으로 이어진 프랑스 남부지역에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개혁교가 가장 세력을 얻었던 1559-1565년 사이에 1500개 정도의 공동체가 존재하였고, 총 인구의 10-12%에 해당하는 2백만 개신교 인구의 80%가 프랑스 남부 지역에 밀집된 것이다. 집회에 관련되어선, 개혁교 총회 개최는 허용되었지만, 주교가 시무하는 도시에선 개신교 집회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법률적 측면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천주교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모든 공직 직분내지 신분이 허용이 되었지만, 동시에 매관제도의 폐단을 낳기도 했다. 4개의 도시에선 (Paris, Bordeaux, Toulouse, Grenoble), 천주교 배심원과 프로테스탄트 배심원이 각각 동일한 수로 구성된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정치적으론, 전국적으로 150개의 피난처를 만들어졌고, 그 중 51개는 프로테스탄트를 위한 보호처였으며, 국가 예산으로 지원되었다. 이런 조치는 양 진영 간에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의혹내지 불신으로 의해 생길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가능한 최소화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역사학자 자닌느 가리쏭(Janine Garrisson)은 낭트칙령이 선포된 이후 루이14세의 퐁텐브로 칙령(Edit de Fontainebleau)에 의해 1685년에 동 칙령이 폐지되기까지 비단 일 세기도 채 안 되는 이 시기를 <지혜와 이성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ii) . 게다가 이 칙령은 신자가 아니라 시민을 돌보는 공정한 현대 국가의 싹을 품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인 공존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 졌는가?

한 마디로 그러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렇지 못하기도 했다. 이 칙령은 간단히 정리하면, 카톨릭 국가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조건부로 인정해 주자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톨레랑스> (Tolérance)는 사실 상 불완전한 것이었고,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는 한계적 상황에 빠지기 쉬었다. 칙령은 선포되었지만, 삶의 현장 속에선 칙령의 세부 조항들이 잘 지켜지지 못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카톨릭들, 특히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이단으로 간주되고 왕국을 분열시키는 개신교 종교가 여러 지역에서 발전되어 가는 것을 곱게만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낭트칙령이란 부득이 선택한 최악의 경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도 <종교동맹회원>(ligueurs) 입장과 정치인 입장을 다소 달랐다. 전자는 개혁교인과 어떤 형태라 할 지라도 프로테스탄드와 공존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 당시 이런 극단주의의 리더였던 <귀즈> 공작(le duc de Guise)은 권모술수로 이런 종교적 화해 정책을 시도하는 정권에 도전하고 전쟁도 불사하고 대항했다. 반면 후자는 정치적 타협과 보다 현실적인 통치를 지향했다. 그 당시 정치 강국이었던 천주교 국가 스페인과 같은 외국 세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프로테스탄트와 양립하면서, 종교적 대립을 넘어서 국가 보위를 위해 쌍방간 군사적 동맹을 맺고자 했던 것이다.
중세 당시, 정도의 차이이지만, 유럽의 각 나라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특히 이단으로 간주된 종교와의 갈등은 결국 폭력과 전쟁으로 표현이 되곤 했다. 국가 종교로서의 개념이 지배했고, 한 국가 내에서 종교적 다원성의 개념이 부존 했던 그 시대의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이런 종교적 갈등과 대립은 소위 자신만이 진정한 신앙을 지킨다는 입장, 공동체가 불순한 요소로 전염되는 것을 정화시켜야 한다는 견해, 이단과 연루된 시민사회를 감독 보호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정의감내지 사명으로 포장될 때, 소위 하나님과 국가를 위한 충성의 이름으로 국가 폭력 또는 집단 폭력이 조직적으로 범행되어 온 것도 부끄러운 사실이기도 하다.

낭트칙령의 폐지

전술한 바와 같이, 중세 당시 왕의 칙령이란 그 서두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폐지될 수 없는 왕권적 권위를 상징한다. 심지어 사회 전통에 반하여 마치 일종의 과격을 가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법 시행 자체가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폐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조부 선왕의 칙령을 폐지하면서까지, 종교적 입장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자기 백성 프로테스탄트를 종교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 자격조차 말살하려는 루이XIV의 파괴적인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낭트칙령의 폐지는 그 시대에 정말로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인가?
칙령의 강제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낭트칙령은 그 자체로 스스로 폐지될 수 있는 근간을 스스로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칙령을 선포한 앙리 4세는 긍극적으로 프랑스 왕국이 천주교라는 전통적 종교적 유일성으로 일치되기 원한다는 서원을 한 바 있다 iii) . 특히 절대군주 시대가 열리면서 한 국가에 한 종교를 절대적 조건으로 내세운 루이 16세는 <종교와 사회와 국가>를 한 통치 개념 아래 혼합시켰기에 더욱 그러했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인해 신구 간의 갈등이 유럽 각처에서 야기되었고, 이에 따라 각 국가는 해결책을 강구했다. 독일에선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회의(1555년)를 통해 <영주의 종교가 영내 백성의 종교를 결정하는 방식>(cuius regio, eius religio) 을 채택하였다. 결과적으로 북부와 동부 독일에선 프로테스탄트가 지배적인 반면, 서부와 남부 독일은 카톨릭이 대다수인 지역적 차이를 초래하였지만 종교적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프랑스에선 87년 간의 <톨레랑스> 시기가 종료되자, 절대군주 루이 16세는 “통치자의 종교가 백성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타협 없는 유일한 선택으로 강요한다. 모든 백성이 카톨릭교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재삼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소위 “자칭 개혁종교”(RPR : Religion Prétendue Réformée)로 불리는 프로테스탄트는 국가의 정치적 일치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절대 왕권은 종교적 관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치에서뿐만이 아니라, 종교에서도 일종의 영적 독재도 행사하였다. 선대 왕들이 애써 부분적이나마 지키려 했던 종교적 관용은 오히려 후퇴하고 국가폭력만이 더 강화된 셈이다. 심지어 카톨릭 진영에서 볼 때에도, 절대 왕권이 영혼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회심을 강요한 것에 대한 일부 비판이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낭트칙령의 폐지는 온전히 정치적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프로테스탄트에겐 치명적 타격이 된다. 그 이후 거의 일세기에 걸친 국가 차원에서의 핍박과 폭력으로 프랑스 개신교는 거의 사라져 간다. 다만 광야에서 숨어 살아온 극소수의 <남은 자>를 제외하고선……

결론적으로, 낭트칙령이 프랑스 역사 및 종교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정리하면서 동 주제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근본적으로 종교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거의 40년간 종교적 갈등과 전쟁으로 시달려 온 프랑스 왕국은 어떤 모습이든지 평화가 재정착 되길 갈구해 왔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앙리 4세는, 비록 정치적 이유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내려 놓고, 프랑스 왕으로서 신정국가를 수호하여야 한다는 대다수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카톨릭 신앙을 공식적으로 받아 들인다. 그리고 낭트칙령을 선포하면서 신구교 간의 조건부 공존을 왕권으로 현실화시킨다. 하지만 칙령 서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프랑스 왕국은 근본적으로 천주교가 지배하는 종교적 통일성내지 일치를 염두에 두고 칙령이 작성된 것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과 칙령의 전제 조건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근본적인 안정감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카톨릭에겐 어떤 의미에선 승리를 확인해 준 결과가 된 것도 사실이다. 즉 프랑스에선 결코 카톨릭이 아닌 왕이 즉위할 수 없다는 전제를 증명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트칙령은, 비록 프랑스 왕국에만 적용된 법이지만,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인 프로테스탄트가 자국 내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공식화한 첫 사례가 된다. 오늘날 헌법 정신의 근간이 되는 양심의 자유에 기초하여, 자국민이 선택한 종교를 제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공존하는 길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것을 제시한 점에서도 역사적 교훈이 있다고 사료된다. 특히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불화가 있는 곳에 화해를 주는 기독교, 전쟁을 일삼는 백성을 흩으시고 모든 자를 구원하길 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기본 자세를 되찾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 좋은 교훈이 된다고 본다.

i) Benoît VANDEPUTTE, L’Edit de Nantes en dix questions, in La Croix Réforme 특집호, Les 400 ans de l’Edit de Nantes, 1998, p.7.
ii) Janine GARRISSON, « L’Edit de Nantes et sa révocation », 출판사 Seuil, 1985, 309p.
iii) Benoît VANDEPUTTE, idem.

▶필자: 채희석목사<chaihenri@hanmail.net>

답글 남기기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