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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겐의 노래, 롤랑의 노래, 엘시드의 노래

[유럽에서 보는 유럽이야기]  김학우 목사/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 81회

중세 유럽 대표하는 무훈시(武勳詩)이자 3대 서사시

고대의 대표적인 서사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Epic of Gilgamesh)를 비롯,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그리고 단테의 “신곡”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비해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그리고 스페인의 “엘시드의 노래”는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무훈시(武勳詩)로, 중세 유럽의 3대 서사시로 손꼽힌다.

게르만 민족정신을 추앙한, 니벨룽겐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는 독일 고전문학의 최대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에 게르만 민족들은 인구의 증가와 훈족의 압박으로 대이동을 하게 된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라인강을 중심으로 동고트족이 세운 부르군트 왕국이 훈족에 의해 멸망한 역사적 사실과 게르만의 영웅 “지크프리트”의 전설이 융합되어 있다. 이 작품은 총 39장으로, 1부는 19장, 2부는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는 영웅 지크프리트의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 2부는 훈족의 왕 에첼과 부르군트족이 멸망하는 것으로 종결되고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게르만 특유의 충성심, 충의와 정절, 기사도 정신, 주군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충직한 신하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니벨룽겐의 노래”는 왕에 대한 기사들의 절대적인 충성과 투쟁정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독일 문학에 소재가 됨과 동시에 독일민족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바그너(1813-1883)의 일생의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1876년 8월 “니벨룽겐의 반지”가 바이로이트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할 때에 4일간에 걸쳐 총 16시간 동안 공연했을 정도였다. 나아가 “니벨룽겐의 노래”는 오늘날 판타지 영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반지의 제왕”과도 연관되어 있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은 존 로널드 루엘 톨킨(1892-1973)이 지은 3부작으로,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1898-1963)의 “나니아 연대기”, “어슐러 르귄”(1929- )의 “어스시 시리즈”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중에 하나로 꼽힌다. “피터 잭슨”이 감독한 영화 “반지의 제왕”(2001-2003)은 톨킨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니벨룽겐의 노래”를 소재로 한 “니벨룽겐의 반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난쟁이”와 “용”과 같은 판타지적인 요소가 동일하고,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와 아이슬란드어로 기록된 “에다”(Edda)라 일컬어지는 운문과 산문을 동일하게 사용한 점을 들고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니벨룽겐의 노래’를 읽어야 한다.”고 추천하기도 했다.

이슬람을 넘어 서구 팽창주의를 칭송한, 롤랑의 노래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는 현존하는 프랑스 문학 작품 중 가장 오래된 무훈시로 알려져 있다. “롤랑의 노래”는 서진하던 이슬람 세력을 프랑스의 샤를마뉴 대제(747 ?-814)가 막아내는 과정을 그린 서사시이다. 전투 중 그의 부하 중 하나인 롤랑과 12용사가 전사하고 샤를 대제가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주목할 것은 이슬람의 기병, 즉 바스크인의 기마병들의 전략 전술이다. 그들은 왕의 일행이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골짜기 뒤에서 습격하는 작전을 폈다. 왕과 일행이 급히 회군하였을 때에 그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고, 롤랑 등 12 용사들은 이미 죽은 뒤였다. 778년 피레네 산맥 롱스보(Roncevaux)에서 벌인 전투는 역사적인 사실이며, 롤랑 또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실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롤랑의 노래는 사실과 크게 다르게 편집되어 전해지고 있다. 샤를마뉴 대제는 스페인 지역은 고사하고, 이슬람의 최전방마저도 점령하지 못했다. 롤랑을 습격한 군대는 이슬람이 아니라 바스크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롱스보 전투는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지만, 약 300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결합시킴으로 최고의 무훈시가 되었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 대제를 신격화 하였고 그와 함께한 12기사들에 대한 용맹을 극대화함으로 기사도 정신의 규범이 되었다. 영주들은 왕의 지략과 용맹을 배웠고, 신하들과 병사들은 롤랑의 충성을 최고의 명예로 받들었다. “롤랑의 노래”는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특히 1099년 십자군 전쟁을 합리화 내지 정당성을 역설하는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롤랑의 노래”와 십자군의 전쟁 시기가 서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의심할 의지가 없다. 결국 “롤랑의 노래”는 프랑스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바다를 통한 서구의 해외 정복으로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미 대륙은 신이 백인에게 준 선물이라는 “명백한 운명(1845)”과 서구인들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는 “백인의 의무(1899년)”, 그리고 황인종의 발흥을 막아야 한다는 “황화론(1895)”등은 “롤랑의 노래”의 변형된 논리란 점이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상대성 이론을 발명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원자폭탄이 만들어 졌을 때에 그는 원자폭탄 사용을 반대했다. “인간의 탐욕이 존재하는 한 전쟁이 계속 될 것이다.”라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이슬람을 통해 이슬람 정복을 칭송한, 엘시드의 노래

“엘시드의 노래”(Cantar del Cid)는 1140년경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에스파냐의 최고 문학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에스파냐가 이슬람에 대한 국토회복전쟁에서 실재적인 영웅인 시드 캄페어도르(엘시드, 1040-1099)를 칭송하는 무훈시이다. 전체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추방의 노래”, “혼인의 노래”, 그리고 “고르페스의 굴욕의 노래”로 되어 있다. 평민으로 하급기사인 엘시드는 1065년 왕족들의 시기로 당시 카스티야의 왕인 알폰소 6세(1040 ?-1109)에게 추방을 당하게 된다. “엘시드의 노래”는 엘시드가 추방당해 눈물 지으며 고향을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여! 사악한 적들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쫓겨 이슬람 왕조인 사라고사 무타민 왕에게로 건너가게 되며, 이슬람 왕은 기독교 전사인 엘시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그곳에서 10여 년 동안 이슬람의 정치와 관습을 터득하게 된다. 그는 10여 년 동안 바르셀로나 등 아라곤 지역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를 격파하며 점령해 갔다. 이후부터 이슬람인들은 엘시드를 “나의 군주”란 뜻을 가진 아랍어 “시드”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알폰소 6세는 패전이 거듭되자 엘시드에 대한 적개심을 억누르고 엘시드를 망명지로부터 불러들였다. 하지만 엘시드는 한동안 아무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1094년 5월 마침내 엘시드는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무어 왕국인 발렌시아를 탈환하여 정복자로서 발렌시아에 입성하였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알폰소 6세를 대신해서 발렌시아를 정복했지만, 실제로는 최고 행정가로서 기독교도뿐 아니라 이슬람교도들까지 직접 다스렸다. 1096년 그는 가장 먼저 발렌시아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을 가톨릭교회로 만들었다. 그의 맏딸은 아라곤 왕자와, 둘째 딸은 바르셀로나 백작의 후손과 결혼시켜 군주로서의 지위를 과시했다. 그는 발렌시아에서 얼마간 평화롭게 살았으나 1099년 무라비트 왕조가 발렌시아로 쳐들어왔을 때에 전투 중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발렌시아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엘시드의 노래”는 그가 죽고 난 이후 약 1세기가 지났을 즈음, 지식인들에 의해서 민간에 퍼지게 되었고 이후 에스파냐의 문학과 작품에 다양한 소재가 되었다. “엘시드의 노래”는 에스파냐가 이슬람과의 전쟁 중에 있는 상황에서 재정복에 대한 열정을 불어 넣어주기에 충분한 노래로 성화되었다. “엘시드의 노래”는 독일의 “니벨룽의 노래”와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에 비해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하여 이야기가 전개 되어 신화적인 것이 매우 적지만, 구전과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포함되어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엘시드의 영웅담을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건국신화의 수준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엘시드는 “정복하기 위해서 굴복한다.”라고 한 “윌리엄 쿠퍼”의 말이 더 정확해 보인다.

필자: 김학우/
2070czmk@daum.net/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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