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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믿는다는 것

[로마칼럼]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을까요?

성령 충만한 베드로를 보십시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영어에서는 Is near로 번역했습니다. 아주 가까이 와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도 롬13:11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가까웠다는 말을 At hand로 번역했습니다. 손에 있다고 말입니다. 고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벧후3:12). 주님의 재림에 올인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잘 믿어야 한다는 부담이 커집니다. 그만큼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이 가까워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믿는 다는 것처럼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드믈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확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주님께서 인정하셔야 되기 때문에 언제나 두려움이 따르는 일입니다.
며칠 전 우연히 암 말기 편정을 받은 30대 여인의 일상을 담은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아직 젊은 나이로 한 참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요, 행복하고 즐겁게 사랑스런 아이들을 양육할 세대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치 않은 몸으로 이혼을 당했고 또 두 아이의 양육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포장마차에서 풀빵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런 불쌍한 여인에게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마지못해 병원에 갔더니 암 말기라는 날벼락 같은 선언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금쪽같은 두 아이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겨우 5살, 3 살 된 아이입니다. 하늘이 노래지고 발이 풀려 서있을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아냐, 아닐 거야 외쳐 보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배고파! 하는 어린 남매의 모습이 눈에 밟혀왔기 때문입니다. 입을 앙 다물고 그녀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세워둔 포장마차로 가서 주전자를 집어 들고 풀빵의 홈에 열심히 반죽을 부어야 했고 손님들에게 억지로 웃으며 살갑게 대해야 했습니다. 찾아오는 통증을 견디어야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드디어 피곤한 하루일과를 마치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다리던 두 자녀들은 반가운 얼굴로 엄마를 맞이합니다. 그 두 아이들을 보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립니다.
어린 두 아이들이 험한 세상을 부모 없이 살아가게 된 다는 사실이 서러웠습니다. 그래도 또 다짐합니다.
그래,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라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양육하자고 말입니다. 그녀는 모처럼 생선 반찬을 요리하여 두 아이들의 밥숟갈에 생선을 올려줍니다. 아이들은 좋아라고 하면서 엄마도 먹어, 라고 합니다. 엄마는 아이들의 말에 또 눈물샘이 터집니다.
영문을 모르는 큰 딸이 따라 웁니다. 그러자 둘째 아이도 덩달아 웁니다.
잘은 모르지만 엄마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엄마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두 아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울었습니다. 또한 할 수만 있다면 제 나이에서 얼마를 뚝 떼어 여인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너무나도 슬프고 서러운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상황을 통해 예수 잘 믿는 것에 대하여 배울 수 있었습니다. 몇 달 남지 않는 이 여인에게 두 아이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한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까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까 싶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는 데 누가 이 여인에게, 우리 이번 여행이나 가자하고 제의 했다면 어떻게 대답했을 까요?
세례 요한은 사역의 시작이 “임박한 진노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마3:7,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세례 베푸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대갈일성을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입니다. 임박한 진노란,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바로 코앞에 이르렀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도 했습니다.
심판의 매체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말은 주께서 나무뿌리를 찍어버리기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둥지를 잘라도 뿌리만 살아 있다면 새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찍히면 그 나무는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나무는 사람을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나무의 뿌리는 사람에게는 머리를 상징합니다. 사람은 머리를 다치면 사망하거나 불구자가 됩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함은 사람의 머리에 놓였다고 해석해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앞에 다가온 것으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의 첫 선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마4;17). 이 토록 성령께서는 시대의 급박성을 강조하는 데 정작 우리는 그 부분에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마치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를 보십시다. 벧전4:7, 마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영어에서는 Is near로 번역했습니다. 아주 가까이 와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도 롬13:11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가까웠다는 말을 At hand로 번역했습니다. 손에 있다고 말입니다.
고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벧후3:12). 주님의 재림에 올인 하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모든 정신과 신경을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을 까요?
오래전에 구라파에서 성공했다는 분과 한 방을 사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성공했고 돈이 많다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증권에 투자한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는 증권 소식을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0.01포인트라도 내려간 날은 종일 속상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반대로 미세하게라도 오른 날은 기분이 뛸 듯 좋아진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스스로의 덫에 걸려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분 같습니다. 한 푼도 들고 가지 못할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분과 같지는 않는지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2/재위284-305) 황제가 있습니다.
그는 현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병사로 들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는 위기에 빠진 로마의 혼란을 수습하였고 개혁을 통해 로마의 쇠퇴를 막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쇠퇴가 기독교 때문이라고 여겨 잔혹하게 기독교를 핍박했습니 다.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그를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욕장을 짓는 일에 로마군대에서 기독교도들을 차출하여 건축하도록 하였고, 그들 10,203명을 바울을 죽였던 바로 그 자리에서 목을 쳐 죽인 잔인한 황제입니다.
그런데 그의 경호대장 세바스티안(Sebastiano246-288)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마치도 아합의 왕궁 맡은 자 오바댜(왕상18;3-4)처럼 말입니다.
세바스티안은 황제의 기독교도 말살정책에 마음속으로 항거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기독교도들을 구원하려고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중 황제는 자신의 오른팔로 여기는 세바스티안이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기독교도라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자신의 총애하는 부하이었기에 기독교를 버리도록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하들에게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부하들은 한 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그를 무지막지하게 폭행을 가했고, 숨이 끊어진 그의 시체를 하수구에 버렸습니다. 그런 사실을 눈 여겨 본 아내는 그의 시체를 비밀리에 옮겨다가 눈물어린 간호를 했습니다. 아내의 눈물과 간절한 기도의 돌봄은 그를 기적처럼 수생하게 했습니다.
원기를 회복하게 된 그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자주 다니는 길에 잠복하고 있다고 지나가는 황제를 향해,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을 준엄하게 책망하고 회개하고 예수 믿을 것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분명 죽었다고 믿었던 세바스티안이 살아서 길을 막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황제는 너무 놀라 실신해버렸습니다.
한 참후에 정신을 차린 그는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당장 저놈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경호원들은 세바스티안에게 사정없이 화살을 날렸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장렬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죽음의 길을 택하였을 까요?
시세에 영합하는 길을 갔다면 최고의 영화를 누리고 권력이 주는 달콤함 속에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영생이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세상에 얼마를 더 살기보다 영원한 나라에 웅지를 틀어야겠다고 소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 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심판받기로 작정된 곳입니다. 고로 임시 처소입니다. 여기에 목을 매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무릇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곳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말기 암 환자가 두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잘 믿는 일이고, 성도가 바로 사는 길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다짐하십니다.
예수 잘 믿는 성도가 되겠다고!

필자: 한평우/chiesadiroma@daum.net/ 로마한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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