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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역사기행

서구중심 교회사관 비켜서 보는 아시아 교회사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1회) 실크로드를 따라 유목민에게 나타난 천년 교회사

2018년 2월호 부터 본지는 새로운 기획으로 중앙아시아지역, 실크로드를 따라서 전파된 복음의 역사를 집중 조명하는 최하영 선교사의 글을 시리즈 연재물로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필자는 2005년에 “실크로드를 따라 유목민에게 나타난 천 년의 교회사”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것이 ㈜학술정보에 의해 2007년 책으로 나와 있고 인터넷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이 연구 논문을 중심으로 몇 번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이 논문을 통해 필자의 서구 중심의 교회사관과 가치관에 많은 변화와 도전을 가져 왔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 시프트(사고전환)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이 유목민의 기질(DNA)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IT(Information Technology)의 발달 세계 1위을 들 수 있겠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위 38 군사분계선으로 육로로 갈 수 없는 현 대한민국의 한국인은 그 탈출구로 인터넷을 통한 서핑(surfing, network)으로 그 기질을 표출하고 있다. 또한 항공과 해상을 통한 경제력으로 2050년이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측할 정도로, 한곳에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적인 기질이 있다. 더구나 한국인 선교사도 그 유목적인 기질 때문에 남들이 가지 않는 국가와 세계 오지로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기질에 맞는 선교학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즉 한국인은 저돌적이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정주민족처럼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이처럼 유목민에게 나타난 천년의 교회사 발자취도 마찬가지로 문서로 남겨진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문서로 남겨진 서구중심의 교회사만 배우게 된다. 필자가 2007년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 추방을 맞이하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KFHI)에서 섬기면서 동시에 웨신에서 교회사를 한 학기 강의하였다. 그런데, 서구 중심의 교회사와 동방교회사(혹은 정교회사) 과목은 있는데, 정작 아시아 교회사 과목은 없었다. 그래서 동방교회사 과목을 대체하여 아시아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또한 세계선교전파 경로를 전통적으로 바울이 로마로, 로마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그러면서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와 동시에 사도들도 사방팔방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즉 베드로는 안디옥과 로마로, 안드레는 북방 러시아로, 마가는 이집트로, 마태는 에디오피아와 이란으로, 도마는 인도와 중국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 도마의 제자들의 의해 계속적으로 중동과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북방, 한반도까지 복음의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필자는 2005년에 “실크로드를 따라 유목민에게 나타난 천 년의 교회사”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것이 ㈜학술정보에 의해 2007년 책으로 나와 있고 인터넷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이 연구 논문을 중심으로 몇 번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이 논문을 통해 필자의 서구 중심의 교회사관과 가치관에 많은 변화와 도전을 가져 왔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 시프트(사고전환)을 갖게 되었다.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예수의 인성을 강조하고 신성을 약화시켰다는 이론)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에 그의 추종자들이 추방으로 인해 중동 시리아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로마제국과 적대관계이며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인 사산제국이 다스리는 곳으로, 약 150년간 초대교회 순교역사 이상으로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었다. 그 순교제물 위에 네스토리우스파는 네스토리안(Nestorian) 교단(동방교회, The Church of East)를 세웠다. 제3차 네스토리안 공의회에서 가톨릭과의 독립을 선언하고 최고의 수장을 총대주교라 하였다. 그리고 성직자의 혼인도 승인하면서 서방교회와 점점 멀어졌다.

그 후 네스토리안 교회는 헤프탈(백훈족)에게 선교사를 파송하여 문어체도 만들어주고 농업도 가르칠 정도로 선교적이고 개혁적인 교단이 되었다. 이미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가 539년에 대주교구가 될 정도로 북방으로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에 북방의 타타르와 케라이트, 위구르, 나이만, 메르키트 족에 영향을 미쳤다. 6세기 투르키스탄 제국때에는 투르크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 호라산 족장이 개종을 하였다. 당나라 이연의 어머니도 네스토리안인(혹은 경교인)이였으며, 태종의 문화포용정책으로 635년에 아나본 사절단이 시리아어 경전 530부를 가져와 번역하고 교회들을 곳곳에 세웠었다.

이런 시기에 무함마드(Mohammed)가 가난한 삼촌을 따라 장사를 다니면서 유대교와 단성론 주교를 만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었다. 그 후 칼리프들은 네스토리안과 멜키트파(콥틱), 단성론 기독교 있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 중 네스토리안은 이 이슬람 국가 내에서 학교와 학문에 영향을 주었다. 이에 서기 1000년 경에는 이 지역에 네스토리안 주교가 250명이나 되었을 정도로 세계적인 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1095년 가톨릭의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13세기 몽골제국의 태동으로 실크로드 따라 동서문명이 활발해졌다. 칭기즈칸을 비롯하여초기 대칸들은 측근에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을 많이 등용했고, 그 왕후들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었다.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일칸(중동 지역)의 설립자인 훌라구가 40년간 기독교를 부흥시키면서 동서간 여행과 교역이 자유로웠을 정도로 몽골의 평화(PAX MONGOLIA)를 이루었다. 이때 마르코 폴로도 여행할 수 있었고 동방견문록을 썼다. 1281년 몽골인이 네스토리안 총대주교가 되었고, 그의 친구 소바가 로마에 사신으로 갔다 미사를 집행했는데, 그곳 주교들은 “언어는 다르나 전례는 같다”고 했다. 그런데도 몬테코르비노 요한(프란체스코회 수도사)를 북경(칸발릭크)에 보내 가톨릭교회를 세우고 네스토리안을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유교를 국교로 하는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기독교는 핍박과 단절로 인해 급격히 쇠퇴하였다. 더구나 몽골의 세 왕국(일칸, 킵착, 차카타이)이 이슬람화되었다. 이런 중에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등장으로 이 지역의 교회는 파괴되고 기독교인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잇스쿨(키르기즈스탄)부터 시작된 흑사병이 실크로드따라 그나마 남아있던 기독교 공동체를 쇠퇴시켰다. 그리고 유럽의 르네상스와 신대륙 발견으로 동서의 문화와 경제, 종교의 길인 실크로드가 붕괴되는 원이기도 했다. 15세기 이후 네스토리안은 신파인 갈데아파가 로마 가톨릭에 흡수되었고, 구파인 앗시리아파가 쿠르디스탄 모슬을 본거지로 오늘날까지 힘겹게 이어오고 있다.

이와 같이 실크로드따라 유목민의 천년(5세기~15세기)의 역사 속에 네스토리안은 동서문명의 교류와 만남을 주선하였고, 암흑기 중세 서구를 문명화된 동방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네스토리안은 한번도 국가 종교가 되지 않았고, 박해와 순교가 낯익었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5세기 이후 가장 선교적이며 개혁적인 교단으로 아시아 선교의 일익을 감당하였다. 이에 필자는 이들의 기독교 역사 중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을 선택하여 우리 조상 유목민 속에서의 놀라운 믿음의 선교를 돌아보면서 그 조상들이 가졌던 믿음을 회복하길 소원한다.

<필자: 최하영 선교사/ hydavid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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